기계가 만든 나, 내가 만든 나 ― 알고리즘이 정의한 정체성과 취향의 혼란 속에서

넷플릭스가 생각하는 나는 누구일까
― 기계가 내 취향을 정의하려 들 때 생기는 이상한 소외감에 대하여

매번 넷플릭스의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를 스크롤할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가 싸늘해진다. 마치 프로이트풍 놀이공원의 검은 거울들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스크린 속 목록은 대체로 이렇다 : 어딘가 부족하지만 착한 심성을 가진 백인 여성이, 똑같이 결핍된 한 남성과 좌충우돌하며 사랑을 완성해가는 90분짜리 로맨틱 코미디. 그다지 대단치도 않은 저예산 휴먼드라마들, 끝없이 이어지는 할리우드식 구원서사. 리스트만 보면 제니퍼 로렌스의 위키피디아 필모그래피를 복붙해 놓은 것 같다.

무엇이 넷플릭스를 그렇게 믿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어떤 신호를 내가 이 기계에게 보냈기에 이토록 나를 “로맨틱 코미디의 수용자”로 정의해버린 것일까. 《노트북》 위에 마우스를 잠깐 멈췄던 일? 혹은 크리스마스 특집 B급 영화에 ‘비웃음’을 목적으로 한 클릭? 어쩌면 이런 일들은 기계의 세계에서 ‘흥미’라는 단어로 재정의되고, 곧이어 사용자 정체성의 축이 된다.

넷플릭스 알고리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것이 정말 사실 같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이 서비스는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하루의 끝자락,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일도 인간 관계도 잊고 싶은 그 깊은 피로의 시간. 알고리즘은 말 없이 침대 머리맡에 <브리저튼>이나 <에밀리, 파리에 가다> 같은 무해한 콘텐츠를 채워준다. 도파민은 조금, 멜로는 많으며,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에 최적인 세계.

그렇다, 도망치고 싶을 때 이 시스템은 위안이 된다. 넷플릭스의 CEO가 농담처럼 말했듯, 이들의 진짜 경쟁자는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가 아니라, 잠이다.

그 순간만큼은 나 역시 납득한다. 나도 그런 ‘좀비 시간’의 보호를 받고 싶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순응’ 이후 생겨난다.

언뜻 보기엔 자유의지 같지만 사실은 매우 좁은 선택지 위를 걷는 기분. 마치 누군가 내 눈앞에 몇 개의 색연필만 꺼내놓고 ‘자, 원하는 색을 선택해 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작 여섯 개의 선택지를 주고는, “네가 고른 거야”라고 확신시키는.

콘텐츠는 확산되어야 한다. 때론 위로하고, 때론 불편하게 하고, 또 때로는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문화 소비란 그렇게 확장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질문해야 할 건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욕망과 연계된 상태로 알고리즘이 설계한 작은 우리 안에 갇혀 있지 않은가?

조셉 투로우(Joseph Turow)는 『니치 앤비(Niche Envy)』에서 이렇게 쓴다.

“새로운 틈새 시장의 논리가 개인의 고유성과 차별화를 강조할수록, 우리는 건강한 시민 공동체의 기본 토대인 ‘소속감’을 잃게 된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를 너무 ‘개인화’하는 시스템은 결국 인간다운 연결감을 해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로맨틱 코미디를 전면 거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게 내가 보고 싶은 거의 전부라고 정의하는 어떤 시스템에는, 미묘한 불쾌감과 불안을 느낀다. 기계에 의한 이 편향된 정의는, 인간으로서 내가 지닌 다면성과 미래의 가능성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다.

넷플릭스의 추천은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너무 익숙해서 식상하다. 그건 기계가 ‘기억하는 나’에 대한 판본이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클릭’만으로 정의될 존재는 아니다.

나는, 우리가 각자가 가진 호기심으로 채워 나가는, 넓고 기이하고 날것 그대로의 문화 생태계를 원한다.

그러니 오늘은 가볍게, 넷플릭스의 목록에서 벗어나 볼까 한다.

적어도 이름이 제니퍼거나, 라이언이거나, 키워드에 “운명”, “사랑”, “결혼”이 들어가는 콘텐츠는 클릭하지 말자고.

기계를 조용히 거절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Inspired by Lizzie O’Shea’s original essay and Maria Popova’s timeless rhythms of reflective p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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